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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자식과 화냥년, 그리고 성추행 본문

에세이

호로자식과 화냥년, 그리고 성추행

모피어스 김 2018. 2. 10. 10:21

우리말에는 정말이지 잔인한 욕 두 가지가 있다.
바로 '호로자식'과 '화냥년'이라는 욕이다.

네이버 사전에 찾아보니 호로자식은 '애비 없는 자식'을 뜻한다. 애비가 없어 버릇 없이 큰 자식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우선 아버지의 부재가 어떻게 욕설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무슨 도덕과 예의를 보장하는 존재인가? 아버지도 아버지 나름이다.

게다가 이 말에는 아버지 없는 가정을 '비정상'으로 보는 시각이 깔려있다. 왜 어머니 없는 가정은 놔두고 아버지 없는 가정만 비정상으로 보는가? 정작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은 어머니 아니던가? 대부분의 가정에서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녀의 성장과정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존재다. 조선시대라고 달랐을까?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지나치게 부각되었다.

화냥년이라는 욕은 또 어떤가? 잘 알려진 것처럼 '화냥년'의 유래는 '환향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붙잡혀 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단어가 욕이 된 사연은 더 기가 막히다. 위로를 받아야 할 여인들이 모욕의 대상이 됐고 그들을 가리키는 말은 조선의 대표적인 욕설이 됐다.

'환향녀'가 '화냥년'이 된 것은 전란을 막지 못한 인조를 비롯한 조선 꼰대들의 상처 받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전쟁에 패하고 남한산성에서 나와 오랑캐에게 상투를 잡히고 이마가 터지도록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청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그 쓰라린 기억.. 그 기억을 잊을 만 하니까 청에서 끌려갔던 여인들이 돌아온 것이다. 상처 받은 알량한 남아의 자존심이 조금이나마 회복됐다 싶을 때 돌아온 이 여인들이 곧바로 저주와 모욕의 대상이 된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오랑캐에게 순결마저 잃었으니 지나치게 남성적 자아가 비대한 자들의 입에서 위로는커녕 욕설부터 튀어나온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호로자식'과 '화냥년'은 조선의 기형적인 가부장적 사회질서가 만들어낸 욕설들이다. 조선은 위로와 배려가 필요한 자들에게 너무나 모질고 잔인한 사회였다. 상처 입은 못난 아버지의 자존심은 죽지 못해 살아돌아온 여인들을 향해 차마 듣지 못할 언어적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양란을 겪은 조선의 가부장적 사회질서는 권위를 잃었고 이때 해체됐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의 꼰대들은 오히려 경학을 진흥시키면서 실추된 권위를 인위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때부터 조선의 가부장적 사회질서가 갖는 권위는 근거를 갖지 못하고 터무니 없는 것이 된다. 마치 도적이 쳐들어오자 제일 먼저 도망간 아버지가 돌아와 아랫목을 차지한 격이다. 분노한 자식들이 묻는다. 당신이 왜 거기에 앉느냐고.. 그러자 아버지는 근엄하게 대답한다.

"아버지니까..."

이후 조선 꼰대들의 권위의식은 병적인 것이 된다. 근거를 잃은 권위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를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들을 참지 못한다. 그들의 주장이 타당하건 말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비뚤어진 권위는 자신에 대한 도전 그 자체를 죄악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내면에 똬리를 틀고 앉은 자격지심은 도전자들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기 쉽다. 권위를 인정 받지 못한 자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할 수 있는 선택은 물리적 폭력을 동원한 '강요'밖에 남지 않게 된다.

조선 꼰대들의 이 병적인 행태가 지금은 사라졌을까?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이 자들의 멘탈리티를 물려받은 자들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많다. 그리고 퇴행의 길을 걸은 조선 후기사회가 남겨놓은 가부장적 사회질서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얼마 전 한국 문단내부의 성추행이 문제가 됐고 안태근의 어이없는 간증에 열 받은 서지현 검사가 직접 뉴스룸에 나와 그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기소권을 갖는 강력한 집단에 속해 있어도 여성이면 인권을 유린 당해야 했던 것이다. 문단 여성 작가들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그들은 꼰대들의 보복이 두려워 성추행을 당하고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반면 성추행의 당사자들은 별로 죄의식이 없어보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가부장적 사회질서는 남성, 나이 많음, 아버지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권위와 가치를 부여한다. 이런 분위기와 체제가 오래 지속된 사회에서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내면화된다. 이런 사회에서 성장하고 오래 사회활동을 해온 남성, 특히 사회적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여성들에게 좀 함부로 해도 용인될 수 있는 존재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권위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원래 권위는 품격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 사회적 인정이라는 형태로 자연스럽게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근거도 없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부여됐을 때 이것은 잘못 사용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골프장에서 캐디를 성추행한 정치인은 '손녀 같아서' 그랬다고 말해 공분을 샀다. 이 말에는 '나 정도면 그래도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깔려 있다. 문제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권위 속에서 오래 살아온 자의 이 어이없는 착각이 성추행이라는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피해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자신이 성추행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자들에게 성추행은 술 먹고 한 장난 정도의 행위인 것이다. 성추행이 술 먹고 한 장난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가부장적 사회질서가 부여한 남성, 나이많음, 지위에 과도하게 부여한 권위가 이런 자들의 내면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들에게 성추행은 사회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취할 수 있는 심심풀이용 프리미엄 정도인 것이다. 다시말해 자신이 그럴만 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한 행위인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피해자들의 침묵이다. 가부장적 사회질서는 피해자들의 인권보다 가부장의 권위를 지키려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피해자들의 침묵은 사태해결에 가장 큰 독소가 된다. 이제 침묵해서는 안 된다. 입을 열어 '주제파악을 하시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사회분위기도 많이 바뀌고 있다. 최근에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Metoo운동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법적으로 성추행은 이미 불법이다. 문제는 가부장적 사회질서가 심어놓은 잘못된 인식인 것이다. 피해자들과 이들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더 커져야 현실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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