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i.love.Story
드라마에 사용된 영화적 소품들 본문
요즘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들 중 드라마로 진출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드라마에 영화적 기법이 사용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최근들어 드라마에 소품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그 한 예다. 소품은 주로 그동안 드라마보다는 훨씬 더 시간의 제약을 받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심리상태,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암시, 글이나 말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운 정서 등을 보여주는데 더 없이 좋은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드라마에서도 간단한 소품을 이용한 이러한 기법이 활발하게 응용되고 있다.
꽤 오래된 작품이긴 하지만 드라마에서 인상적으로 봤던 소품을 세 가지 정도 소개하고자 한다. 사람의 감정이란 말로 표현하기에 너무 복잡미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이런 감정을 너무나 절절히 표현해낼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다음에 내가 예로 든 세 가지 소품을 보면서 천마디 말보다 사연이 깃든 소소한 소품 하나가 감정이나 정서를 너무나 멋지게 담아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1. 찬란한 유산의 하트목걸이
사랑의 감정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말로 표현되었을 때 그것이 제대로 되었다 할지라도 좋은 평을 얻기는 어렵다. 필경은 신파라는 비야냥을 감수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사랑의 감정을 품은 사람이 찬란한 유산의 선우환처럼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지 못한 캐릭터라면, 그리고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은 고은성 같은 인물이 받아야 한다면 그 감정의 전달 과정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찬란한 유산의 작가 소현경씨는 이것을 하트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로 멋지게 표현해낸다. 선우환은 자기로 모르게 서서히 고은성에게 자신의 마음이 쏠리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그가 난생처음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고은성을 위한 목걸이를 사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은성이 어머니에게 받았던 목걸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준 것이었다. 만약 선우환이 갑자기 뜬금없이 고은성에게 목걸이를 사서 선물했다면 현실에서는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지만 드라마적 상황에서는 개연성 부족으로 시청자들이 약간의 황당함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소현경 작가의 치밀한 설정 솜씨가 빛나는 대목이다.
선우환은 어렵게 마음을 먹고 마련한 목걸이를 은성에게 주지만 갈수록 커가는 선우환에 대한 마음과, 선우환에게 순정을 바치는 승미에 대한 연민, 그 뒤에 버티고 서 있는 백성희의 그림자, 그녀를 오해하고 있던 선우환 가족들의 존재감, 그리고 잃어버린 동생에 대한 책임감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던 그녀의 마음은 이것을 허락지 않는다. 그녀는 선우환과의 만남에서 이 목걸이를 되돌려주고, 혼자 남은 선우환은 괴로움에 만취가 될 때까지 술을 퍼마신다. 그날 밤 술에 취한 선우환이 고은성의 집에 난입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목걸이는 다시 고은성의 손에 들어간다. 처음으로 단둘이서 지새게 된 밤이 지나고 잠이 깬 선우환의 눈 앞에 놓여있던 밥상과 메모... 은성이 진정으로 선우환의 마음을 거부하고 싶었다면 놓여있었어야 할 그 목걸이는 없다. 이 대목에서 사실은 선우환의 마음을 받고 싶었던 그녀의 속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2호점 매출 20% 초과달성을 위해서 선우환과 갔던 동해크루즈 입찰 여행의 과정에서 그녀의 마음은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른 새벽 몰래 숙소에서 나와 어디론가 향하는 은성과 바깥 벤치에서 누워자고 있다가 은성을 뒤따라가는 선우환... 아무도 없는 등대에서 홀로 그 목걸이를 해보는 은성... 이것을 환에게 들키는 장면에서 이 하트모양펜던트 목걸이의 진가는 여지 없이 드러난다. 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 이 목걸이는 은성을 향한 선우환의 마음이다. 만약 이 목걸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선우환은 본래의 성격대로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법이 없는 인물이다. 그의 마음을 단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시각적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이 플롯을 진행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백 마디의 대사보다 이 작은 소품 하나가 은성을 향한 선우환의 마음을 너무도 절절하게 표현해내고 있지 않은가?
2,3 추노의 조약돌과 달걀
찬란한 유산에서 은성을 향한 선우환의 마음이 목걸이였다면 추노에서 언년이를 향한 대길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조약돌이다. 추운 겨울날 바깥에서 언 손을 호호 불며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언년이...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 화로에 조약돌을 따뜻하게 데우는 대길... 데운 조약돌을 몰래 대청 마루에 얹어놓는 대길과 그것으로 따뜻하게 손을 녹이는 언년이의 행복한 얼굴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애정신은 반드시 서로를 부둥켜 안고 신파조의 대사를 늘어놓아야 성립하는 것이 아님을 천성일 작가는 이 장면 하나로 보여주고 있다. 그녀를 향한 대길의 마음만큼이나 따뜻했던 그 조약돌을 언년이는 항상 몸에 간직하고 다닌다.
이 조약돌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중반부나 되어서야 나온다. 바로 대길이 던진 비수에 맞아 신음하는 언년이를 송태하가 업고 피신하는 장면이다. 그녀를 업고 산길을 걷는 송태하... 그녀의 손에서 무언가가 길 위에 떨어진다. 바로 그 조약돌이다. 카메라는 언년이를 업고 길을 재촉하는 송태하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이 조약돌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준다. 이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이것은 대길과의 인연이 끝나고 송태하와의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천성일 작가는 조약돌을 언년이를 향한 대길의 마음과 그 인연의 교차를 표현하는데 참으로 간지나게도 사용했다.
그리고 드라마 추노에서 인상적으로 사용됐던 또 하나의 소품... 삶은 달걀.... 이 달걀은 최장군을 사모하던 주모가 항상 최장군의 밥 속에 몰래 숨겨놓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항상 이 달걀은 대길이나 왕손이의 뱃 속으로 들어갔다. 눈치 빠른 대길과 왕손이가 항상 이것을 빼앗아 먹는 장면은 참으로 장난스럽고 정감 있다. 그런데 이 달걀이 드라마 중반부의 한 장면에서 대길의 상실감과 외로움을 표현하는 소품으로 멋지게 사용된다. 바로 최장군과 왕손이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대길이 혼자 밥을 먹는 장면이다. 사람은 하나인데 밥상은 3인분이다. 평소처럼 대길은 최장군의 밥에서 삶은 달걀을 꺼내 먹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신이 이 엄혹한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수단이 된다. 대길에게 이 달걀을 빼앗아먹는 것은 쏠쏠한 삶의 재미였다. 그것은 단순히 달걀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당연히 최장군의 뱃속으로 들어갈 줄 알고 날마자 정성스레 달걀을 챙기는 주모를 속였다는 통쾌함과 또 그것을 머쓱해하며 날마다 대길이 자신의 것을 빼앗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근엄함을 잃지 않으려는 최장군의 표정을 보면서 느끼는 유쾌한 삶의 정서였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의 달걀을 강탈해가는 만행을 받아주던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실감을 담은 소재인 것이다. 작가의 탁월한 설정과 달걀을 씹으며 눈물을 흘리는 장혁의 연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작가는 글로 많은 것을 표현하는 사람이지만 때로는 글 이외의 다른 표현의 수단을 찾아헤매야 하는 만만치 않은 직업인 것 같다. 내가 봤던, 모두 인기리에 방영됐던 이 드라마들의 소품은 백마디의 대사보다 사람의 감정과 정서를 효과적으로 담아냈던 소품들이다. 성공한 작가의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소현경 작가와 천성일 작가의 이 탁월한 설정을 잘 기억해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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