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i.love.Story
비교우위의 삶을 넘어서 본문
"남 부럽지 않게..."
우리 부모세대의 삶을 지배해왔던 워딩이다.
생존을 위해 살아야 했던 시대에 이것은 소박한 바람이었다.
마당에 정화수 한 사발 떠놓고 혼인을 하던 시대에는 이 말이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갖추고 뭘 해도 했으면 좋겠다는 아주 소박한 희망사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이 말의 의미는 변질되었다. 이것은 이웃에 대해 비교우위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적이고 천박한 욕구를 대변하는 말이 되었다.
그래도 나이가 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데 승용차는 2000cc급 이상은 타야 하고 어디서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유명 골프장 회원권은 있어야 하며 에베레스트에 등정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가는 지역의 사람들이 입는 캐나다 구스다운을 입어줘야 한다는, 이상한 기준을 대변하는 말이 된 것이다.
그래서 중형자동차를 사고, 유명 골프장 회원권을 마련하면 행복해지던가? 이웃의 아이가 고려대에 갔으니 우리 아이를 서울대에 진학시키면 뭐가 달라지던가? 그저 잠시 스쳐가는 심적인 만족감이 전부 다인 것이다.
비교우위를 지키기 위한 삶은 어리석은 삶이자 불행한 삶이다.
아이가 서울대를 가더라도 자기 인생을 살다가 서울대를 가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다. 성적이 안 되서 지방대를 가더라도 그것이 자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면 이것 역시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다.
천박한 시대에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왜곡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달란트의 비유를 보자.
사람들은 5달란트 받은 자가 되고 싶어 한다.
1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나 주인의 평가기준과 보상은 무엇이었던가?
주인의 눈에는 가져간 달란트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충성과 성실이었다.
그리고 5달란트 받았던 자도, 2달란트 받았던 자도 받은 보상은 똑같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잣집에 태어나기도 하고 가난한 집에 태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부잣집에 태어난다 하여 행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그저 나 자신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출생에 관계없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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