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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정신의 허상

모피어스 김 2018. 5. 6. 12:51

혹시 임춘애 선수를 아실지 모르겠다.
(이 분을 안다면 최소 40대에 진입하신 분으로 봐야 한다.)
그녀는 1986년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에 빛나는 메달리스트다.
그녀의 이름에는 지금도 '라면'이 따라다닌다.
당시 언론이 라면 먹고 힘을 내 금메달을 딴 신화적인 존재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성공 신화를 참 좋아한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정신력 하나로 역경을 딛고 일어나 찬란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들..
그러나 당사자는 최근 모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라면은 간식으로나 먹었지 실제로는 삼계탕과 도가니탕 등을 먹고 뛰었다고 털어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당시에는 거액이었던 포상금 1억 5천도 일부만 지급되고 나머지는 은퇴 시 지급되었다고 하니 성공 신화의 결말 치고는 참 많이 부족한 느낌이다.

당시 언론에게 임춘애는 하나의 플라시보였던 셈이다.
성공신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줄 가짜 약제.. 육상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탄생한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 여기에 '라면'을 갖다붙이니 그녀의 이야기는 아주 그럴싸한 성공신화로 재생산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라면 소녀'가 된 것이다.

이후 그녀는 한국에서 헝그리정신의 표상이 됐다.
그녀는 환경과 여건을 탓하는, 한마디로 정신상태가 글러먹은 자들을 훈육하는데 단골소재로 활용됐다. 하루에도 어마어마한 칼로리를 소모하며 훈련을 받아야 하는 육상선수가 라면을 주식으로 먹고 어떻게 체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전문적인 영양학 지식이 없더라도 상식선에서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몇 년 전 직원들에게 헝그리정신이 없다며 질책하는 경영자를 본 일이 있다. 그는 열을 내며 난리를 쳤지만 직원들의 표정에서는 황당함과 짜증스러움이 배어났다. 계속되는 질책에 그들의 표정은 차츰 체념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화장실에 가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헝그리정신? 내가 왜?"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환경과 여건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행위를 한심한 것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이것은 많은 경우에 헝그리정신의 부족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인간은 분명 환경과 여건의 영향을 받는다. 여기에 문제가 있을 경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행위다.

우리 사회에서 헝그리정신은 환경과 여건을 갖추어 줄 책임이 있는 자들이 그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기 위해 사용된 논리가 아닐까? 물론 환경과 여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비용이 들고 많은 공력이 소모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하게 제공해야 할 환경을 제공하지 않은 채 개인의 노동과 열정을 경시하고 착취하는 행위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

전후 세대들이 절박한 생존투쟁의 삶을 살았고 그 덕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지금의 젊은 세대까지 폐허 위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살아야 할까? 또 헝그리정신을 주장하는 상당 수의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에게는 지나치게 환경과 여건을 마련해주려 하는데 이 이율배반에 대해서는 어찌 변명할 지 매우 궁금하다.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헝그리정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적절한 동기부여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성공신화의 상당부분은 과장되어있고 완전히 무에서 시작한 것도 아니며 그 뒤에는 시대적인 특수성과 특혜가 작용한 부분도 많다는 것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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