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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보다는 '제대로'가 중요한 시대

모피어스 김 2018. 5. 7. 23:49

"한국놈들은 시간을 많이 주면 안 돼.. 일정을 바짝 당기고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매일 조져야 돼.."

오래 전 대기업의 한 임원 되시는 분께 들은 이야기다. 말이 좀 상스럽긴 하지만 이 방법은 상당히 효과적이긴 하다.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 데에는 이만 한 방법이 없다. 일단 타이트한 일정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업무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지는 효과도 있다. 문제는 일하는 사람들의 에너지 소모가 심하다는 것이다. 1~2번은 괜찮겠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삶이 피폐해진다.

그러나 대기업의 임원이나 정부 조직의 고위 관료쯤 되면 이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조직이 크다 보니 경쟁은 심하고 막강한 인사권을 쥐고 있으니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그들 앞에 줄을 서 있다. 그러니 일을 시켜서 잘하면 계속 쓰고 못하면 갈아치워 버리면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큰 조직에서는 상당히 하드한 단기전이 반복해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기업에서 이런 일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왜 그런가? 오너들이 경영진에게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이던 시절 이런 방식은 매우 효과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폐허에서 시작한 한국이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고속성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속도전이 있었다. 게다가 이런 단기적 성과 위주의 속도전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정과 잘 들어맞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방법은 후발주자로 2위 그룹에 진입할 때까지는 효과가 있다.

문제는 선두그룹에 진입하면서부터 발생한다. 어떤 분야든 선두그룹에 들어가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션이 생긴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선두의 자리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 새로운 개념, 새로운 디자인, 새로운 기술을 끊임없이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능력을 요구하는 일들이다. 2위 그룹까지는 선발 주자가 만들어내는 것을 적당히 베끼는 것으로 충분했겠지만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는 일은 모방과 속도전을 하던 수준의 조직과 역량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은 현재 우리의 생활수준이 북미와 유럽의 선진국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직 한국은 선진국 대접을 받지 못한다. 우리 스스로도 선뜻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한국은 선진국의 문턱에서 무언가에 발목이 잡혀있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2016년 삼성전자는 연이은 갤럭시 노트7의 폭발사고로 곤욕을 치렀다. 한국은 물론 미국, 대만 등에서도 폭발사고가 일어나 삼성은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삼성은 처음에 외부충격에 의한 발화라는 입장을 내놓았다가 사고가 잇따르자 조사 후 배터리에 결함이 있음을 시인했다. 당시 한 언론은 삼성이 경쟁사보다 제품을 먼저 출시해 시장을 선점하려던 것이 화를 부른 것이 아니냐는 분석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이 언론이 인용한 삼성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좀 더 여유를 갖고 다양한 상황에서 충분히 테스트했더라면 문제를 잡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할 말이 없다."
-2016.09.06 조선비즈 '흥행조급증이 폭발시킨 S7' 중에서 일부 발췌

나는 이 사건이 선진국이 되려는 한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2018년 현재 한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빨리' 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하는 것을 중시하는 마인드다.

그렇다면 제대로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필요한 과정을 충실히 밟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과정이 충실하면 결과물의 완성도는 올라가게 마련이다. 또 어떤 일을 하건 스킬과 경력이 쌓이면 하이퀄리티의 결과물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커지게 된다. 그러나 선진국의 문턱에 서 있는 한국은 이러한 요구사항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속도전을 계속하던 체질과 시스템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드웨어에는 강한 우리나라가 소프트웨어에서는 약세를 면치 못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결과물을 내는 것 못지 않게 과정이 중요하다. 소프트웨어 개발에는 다양한 방법론이 이미 나와있다. 방법론에는 구체적인 프로세스가 정의되어 있으며 각 단계마다 반드시 나와야 할 산출물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IT 프로젝트에서 방법론이 제대로 준수되는 경우는 드물다. 적용될 방법론에 맞게 일정과 예산이 책정되지도 않는다. 속도전 세대인 의사결정권자들이 이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빨리빨리'를 원한다.

IT 강국을 자처하는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인정 받는 소프트웨어를 갖고 있지 못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소프트웨어 뿐만이 아니다. 신약 개발이나 디자인 등 고부가가치의 상품들은 빨리 만드는 것보다는 완성도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들이다. 이런 상품들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한국은 곧 중국에 따라잡히게 되어있다. 아니 이미 상당 부분 따라잡혔고 일부는 추월 당했다고 봐야 한다. 이제 한국은 '빨리' 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하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마인드 문제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고퀄리티의 결과물을 내기 위한 복잡다단한 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 과정을 감내하기에는 조급증이 너무 심하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왜 그런가? 이것에는 아직까지는 한국을 추격하고 있는 중국이 더 강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겨우 지키고 있는 아슬아슬한 우위는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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